윈터스 본 – 할리우드의 진정한 공포이자 저력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소생한 만물은 여름에 이르러 모든 체온을 발산하며 열정적으로 생명력을 불태웁니다. 마치 그것이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을 과시라도 하려는 것처럼… 과욕에 사로잡혀 에너지를 소진한 만물은 수확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린 배를 채우는 데 집중합니다. 이제 그들은 냉혹한 겨울을 인식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한시라도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무릇 호시절은 쏜살같이 흘러가도 반대의 경우에는 더딘 법입니다. 그래서 겨울이 오면 대개의 경우 몸을 움츠리거나 잠을 청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하루하루를 이어가느라 힘겨운 나날을 보냅니다. 황량한 대지에 남겨진 생명은 싸늘한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타자의 도움 없이 철저히 외면당한 상태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견뎌야만 합니다. 삶이란 오묘한 것이라 계절의 생성과 순환도 성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는 겨울의 혹독함을 저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누구 하나 자신을 도와주지 않냐며 절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카이 크롤러>를 통해 오시이 마모루가 전언하듯이, 그래도 우린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암흑을 마주하고 있는 듯해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비록 ‘나이트 비전’을 건네줄 사람은 없지만 손을 뻗어 벽을 더듬으면서라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삶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설사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다다른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허무함에 불과할지라도,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윈터스 본>의 주인공 ‘리 돌리’는 열일곱 살의 앳된 소녀입니다. 이 또래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거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리는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마약과 관련한 범죄에 연루된 혐의로 인해 하루아침에 경찰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용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지만 이내 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가뜩이나 살림이 넉넉지 못했던 리의 가족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별 수 없이 매 끼니를 감자로 때우고, 기르던 말은 먹이를 줄 수 없어 이웃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 리는 경찰로부터 집에서 곧 쫓겨날 판국이라는 통보를 받습니다. 아버지가 보석금을 내려고 집과 부지를 모두 저당 잡혔는데, 지정일에 법정에 출두하지 않으면 몽땅 몰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엄동설한에 신세를 질 곳이라곤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리로서는 금시초문인 소식이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을 확률마저 높아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당장 그에 상응하는 돈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리는 결국 홀로 자신의 가족과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나서기로 합니다.

리는 비빌 수 있는 언덕이란 언덕은 다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행방을 묻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형도, 함께 어울리던 사람도 답을 주기는커녕 만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절박해진 리가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하자 거짓말로 아버지의 죽음을 위장하려 하고, 급기야 위협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이들이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심증은 짙어지지만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어 막막할 따름입니다. 나이와 달리 가녀림보다는 강인함에 어울리는 리지만 더는 무리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리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어린 동생이라도 제대로 먹여 살리고자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하는데…

감상을 논하기 전에 우선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윈터스 본>은 이상의 줄거리와 달리 전형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와 같은 흥미일변도의 영화가 결코 아닙니다. 분명 사건이 있고, 해결을 하기 위해 실마리를 잡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미스터리의 구조를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윈터스 본>은 우리가 익히 길들여진 장르의 형식을 상당부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우드렐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윈터스 본>은 아버지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한 소녀를 담은 ‘드라마’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미스터리의 구조를 가졌으되 차라리 드라마에 가까운 이유는 연출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이 영화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차지한 데브라 그라닉은 철저히 장르의 공식을 거부합니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여자가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 그렇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윈터스 본>은 미스터리의 구조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드라마와의 연계가 굉장히 매끄럽습니다. 이처럼 섬세한 연출은 남자보다 여자에게서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하죠.

게다가 <윈터스 본>에는 다분히 페미니즘의 시선이 서려있습니다. 이 점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건 단순히 주인공이 가련한 십대 소녀여서 내는 의견은 아닙니다. 리의 가족은 아버지가 사라짐으로써 붕괴 일보직전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 리를 포함한 가족구성원은 어차피 아버지에 대한 의존도나 부성애의 갈망이 커보이지 않습니다. 리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마약범죄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 그의 존재 혹은 부재의 여부는 가족에게 중대 사안이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사라졌을 뿐인데 리의 가족에게는 곧장 커다란 시련이 들이닥쳤습니다. 있으나마나 한 사람에 불과할지언정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그의 존재만으로도 어떤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나마 아버지란 작자는 보석금을 내고자 가족 몰래 집과 부지 일대를 저당 잡힌 자인데 말입니다. 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지만 이를 알고서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아마 가족의 안위가 걸려있는 사안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자 노력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럴 틈에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보존하고자 안간힘을 쓸 뿐입니다.

<윈터스 본>이 가진 페미니즘의 코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리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은 일가친척이 모여 살면서 묘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로 남미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카르텔’로 다들 저마다의 역할을 하며 마약조직을 꾸려갑니다. 리는 아버지를 수소문하기 위해 이들을 방문하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집집마다 하나같이 여자가 나와서 맞이합니다. 그곳에서 남자의 허락을 득해야만 집 안에 발을 들이거나 만날 수 있고, 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도 남자입니다. 그 외의 사람, 즉 여자는 남자의 하수인으로 비춰집니다.

주식 : 다시 말해 이 마을의 가정은 전근대적인 가부장의 틀에 묶여 있으며 남자는 여자 위에 군림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윈터스 본>에서 여자가 하는 일이라곤 문 앞에서 리를 맞아주거나 남자들이 리를 만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고작입니다. 기껏해야 남자들을 대신해 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으니 하수인이란 저급한 표현이 무례는 아닙니다. 더군다나 리의 어머니는 병을 앓아 더없이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다만 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쪽도 대부분 여자였고,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여자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가진 비극적인 동질감이 엿보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마을의 여자들이 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장면은 <윈터스 본>의 백미입니다. 이로 인해 영화는 미스터리의 구조를 가진 드라마임과 동시에 열일곱 살 소녀의 뼈아픈 성장기로 읽히게 됩니다. 입에서 나지막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올 만큼 끔찍했지만, 리에게는 혹독한 세상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심리적인 성장통으로 작용합니다. 아울러 리의 이것을 여자들이 함께 한다는 것도 꽤 의미심장합니다. 이때조차 그들은 하수인 내지 뒤치다꺼리의 역할이지만, 흡사 난생 처음으로 생리를 한 딸의 곁에 있는 어머니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반면 <윈터스 본>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들은 악의 근원입니다. 리의 아버지는 사고뭉치고,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들은 모종의 이해관계에 얽혀 입을 다물었으며, 이들의 우두머리는 늙고 추악한 할아버지입니다. 응당 리를 도와야하지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보안관은 또 어떻고요. 그가 보여준 남성다움은 리가 아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비루한 마초근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들에게 기생해서라도 살고자 발버둥치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를 경계하는 저지만, 영화 속의 구도가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음이 씁쓸합니다.

이것을 드러내는 데 자극과 흥미 위주의 연출은 백해무익할 따름입니다. 데브라 그라닉 감독도 <윈터스 본>의 이야기는 한낱 유희거리로 다뤄질 것이 아니라 여겼는지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연출로 일관합니다. 그런 면에서 <윈터스 본>은 ‘하드보일드’와도 통합니다. 흔히 하드보일드라고 하면 유혈이 낭자한 영화를 떠올리기 십상이나, <황해>의 두 번째 리뷰에 첨부했듯이 그 정의에 담긴 본연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주로 물리적인 폭력을 묘사하는 데 활용이 되긴 하지만 하드보일드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을 전제로 합니다. 어찌 보면 철저히 방관자가 되어 본 그대로를 표현할 뿐인 셈이죠.

그렇다면 <윈터스 본>에서 데브라 그라닉 감독이 유지하는 입장은 하드보일드와 진배없습니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흥미나 재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스릴이니 서스펜스니 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연출은 물론이거니와 신파도 없습니다. 어린 소녀가 가족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한다면 으레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해 눈물샘을 자극할 법도 합니다. 이것이 지금껏 우리가 보아온 비슷한 류의 공식이자 무기였지만, <윈터스 본>은 그조차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값싼 동정은 현실 속의 주인공들에겐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브라 그라닉 감독은 을씨년스러운 배경을 활용하는 것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줍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리의 집은 앙상한 가지의 나무와 잿빛 하늘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잡초가 솟아난 숲에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종종 보이는 이 전경은 공허함으로 가득하고 고립된 캐릭터의 심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겨울이니 눈으로 뒤덮인 적막한 공간을 배경으로 삼으면 어땠을까?" 만약 제가 감독이었다면 결단코 사양했을 겁니다. 새하얀 눈이 상징하는 것처럼 세상은 순수하지도 않고,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윈터스 본>은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결말에 다다라도 아버지의 실종 뒤에 가려진 육하원칙 중 상당수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대하시는 것처럼, 즉 장르의 공식에 따라 확연한 종결을 찾으리라는 기대는 깨끗이 접으세요. 관객과 달리 현실을 절감하고 있는 리는 심판 따위의 의사도 없으며 허무맹랑한 정의에 기대지도 않습니다. 지금 말한 건 스포일러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윈터스 본>을 보기에 앞서 영화의 진면목을 직시했으면 하여 힌트를 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오락영화의 기준에서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윈터스 본>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장르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신다면 – 제가 그랬듯이 – 제목처럼 겨울의 극장가에 홀로 우뚝 서서 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 영화를 만났음에 기뻐하시게 될 겁니다. <윈터스 본>의 진정한 가치는 비정한 현실의 반영에 있다는 것만이라도 기억해주세요. 그럼에도 작은 희망이나마 건네고 있다는 것 역시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현실에도 작지만 따스한 희망이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는,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송구스럽게도 "왜?"라는 질문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칸트, 니체, 라캉 등의 당대의 철학자들이라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줄 수도 있을까요? 당연히 전 저들의 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되는 범인인지라 그저 얼버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살아보고, 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살아본 다음, 눈을 감기 전에 제 후손들에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답이 부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기를 바랍니다. 이를테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더라"고 유언을 남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덧)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의 영화가 전 세계를 점령했다는 말이 나돈 지 한참입니다. 이젠 거의 지겨울 정도인데, 할리우드가 정말 무서운 건 소위 말하는 블록버스터 무비의 존재 따위가 아닙니다.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휘황찬란한 특수효과를 동반하는 영화는 부러움의 대상일지언정 이상향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블록버스터만이 난립한다면 반자본주의자나 영화의 예술성을 중시하는 자들에겐 비아냥의 대상에 불과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윈터스 본>과 같은 영화도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은, 할리우드를 그저 영화의 상업성이 이룬 극치라고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극과 극의 영화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할리우드의 진정한 공포이자 저력입니다.

덧2) 제니퍼 로렌스는 물론이고 존 호키스의 연기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보안관과 대치하는 장면을 주목하세요.